위니의 여행이야기 :: 여행 썰 - 시베리아 횡단열차, 결국에 찾지 못한 동전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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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개월 간에 여행을 되돌아보면 내가 잃어버리거나 도둑질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괴한의 습격을 받는 일은 없었다.

간혹 가다가 뜬금 없이 인종차별을 당하는 경우는 있었다만, 길다면 긴 기간의 여행동안 별 탈 없이 보낼 수 있던건 정말 운이 좋았다.


그렇다고 여행을 하면서 그런 일이 필연적이냐? 그건 또 아니다.

불미스러운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도, 또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건 내가 원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니까.


별 탈 없이 보냈다고 하면서 이렇게 여행 썰이라고 제목을 붙히고 글을 적는 이유는 별 탈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넓디 넓은 시베리아 대륙을 달리는 99번 열차 가장 낮은 좌석인 3등석에서 생겼던 일이다.


횡단열차를 타고 3일 째였나, 이제 내 칸에 타고 있는 친구들 하고는 웬만해서는 다 친해졌다.

서로 얘기도 하고 밥도 같이 먹고 말은 안 통해도 마음은 통하면서 지냈다.


물론 다 친해진건 아니었다.

무슨 불량배들(?)인지 생긴거만 그래도 안 그런 애들인지 몰려다니는 애들이 있었다.

다들 팔뚝에 그림을 하나씩 크게 박고 온 몸에 문신을 칠했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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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술을 마시는건 안되지만 차장의 눈치를 보면서 다들 술을 마시는 분위기다.

보드카를 가장 많이 마시곤 하는데 열차가 길게 정차할 때면 다들 나가서 외투 안에 술을 한 병씩은 들고 들어왔고,

덜컹거리는 열차 속에서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곤 했다.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도 보드카를 한 두잔 원샷으로 마시곤 했지만 그 친구들과 길게 놀진 않았다.

하필 또 내 자리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거기에 계속 앉아있고 싶진 않았던 나는 내 옆자리에 있는 한국인 친구 정현이 자리에 가서 앉아있었다.


열차에는 무에타이 대회에 나갔다가 다시 동네로 돌아가는 어린 친구들이 있었는데,

자기들을 소개할 때 나이를 twenty three, twenty four 라고 하는거 아닌가? 아니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뭐 이렇게 어려보이지?


알고보니 13살, 14살이라고 얘기하는 거였는데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니라 헷갈려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딜 봐서 너네가 20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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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고 사진도 찍으면서 놀다가 내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여행하면서 자기 전에 항상 확인하는게 있다.

'여권, 핸드폰, 지갑, 동전지갑'


여권은 내가 바지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고.. 핸드폰도 가지고 있었고 지갑도 있었고..

동전지갑은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어 놨었는데..


근데 왜 동전지갑이 안 보이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주머니를 뒤지고 내 자리 침낭을 뒤집어까고 

먹을 것이 들어가있던 봉투를 다 뒤지고 2층 침대도 보고 자리 밑에도 보는데 없다.

분명한건 정현이 자리로 갈 때 바람막이를 내 자리에 벗어두고 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동전지갑이 있었다.



적어도 내 옆에 앉아 있는 친구 로짐은 범인이 아니다.

나의 얘기를 듣고 있는 그의 눈을 보면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내 자리에 앉아 있었던 놈들 중 하나겠지. 젠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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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내가 방심했구나.

횡단열차에 탄지 3일이 돼서 그랬을까, 나는 여행하면서 아무도 믿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까먹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바람막이 안에 동전지갑을 넣어놓고 다른 자리로 놀러갔고,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내 자리에선 술판이 벌어졌고 술판이 끝나고 다시 돌아와보니 내 동전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리 봐도 내 실수로 어디에 흘린건 아니었다. 분명히 누가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가져갔는지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동전지갑에 들어가있던건 러시아 돈인 루블. 다행히도 한국돈으로 6천원 정도의 돈만 따로 넣어놨었다.



나는 동전지갑을 찾으려고 데이터에 연결 되었을 때 내 동전지갑 모양인 세균맨 그림을 다운 받고, 

구글 번역기에서 지갑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저렇게 써놓고 지갑이 없어졌다고 몸짓 발짓으로 설명하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결국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 큰거 안 잃어버리고 한국 돈으로 6천원 정도면 선방한거지.

근데 나는 돈이 아까운게 아니라 지갑이 아까웠다.



고베 호빵맨 박물관에서 세균맨 지갑을 차고 세균맨과 함께


사실 난 버릴만도 한 상태의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스타일이다.

최근에 방 청소를 대대적으로 할 때는 과감하게 버리곤 했는데 콘서트 티켓이나 영화표나 자질구레한 것들 까지 버리지 못하고

계속 모아놓는 성격이고 세균맨 동전지갑도 너무 오래 써서였을까 지갑에 세균맨의 까만색보다

지갑이 헤져서 보이는 흰색이 더 많이 보일 지경이었다.



사진을 보면 왼쪽에 있는 내 배가 나와보이지만 실제로 나왔다..(?!)


내가 이 세균맨 동전지갑에 더 애착이 갔던 이유는 후쿠오카 졸업여행 하는 동안에 여자친구랑 같이 샀던 지갑이 이 지갑이었다.

나는 세균맨, 여자친구는 짤랑이 지갑을 샀는데 여자친구는 이 지갑을 잘 안 썼겠지만, (아마?)


난 후쿠오카 이후로 유럽여행, 인도여행을 다녀오는 동안에도 계속 이 지갑을 썼고

이번에 4개월 동안의 여행에도 세균맨 지갑을 계속 쓸 예정이었다.


근데 이걸 도둑 맞았으니.

차라리 돈은 가져가더라도 지갑은 찾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미 지갑은 내 손을 떠나버린 후였다.


열차에서 친해진 아저씨 세르기가 기차에 있는 경찰이라도 불러줄까? 라고 했지만

난 굳이 귀찮은 소동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난 세균맨 지갑을 머리 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계속 생각해봐야 짜증만 날 뿐이고 앞으로의 내 여행,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의 남은 일정을 잘 보내려면 잊어야했다.

그래야 어제의 아픔은 잊고 내일의 행복을 생각하니까.


그리고 오히려 여행 초반에 잃어버린게 다행이었다.

그 뒤로 나는 여행하면서 항상 내 물건을 신경쓰고 긴장을 풀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이 녀석, 머리 속에서는 지웠지만 마음 속에선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쓰면서 저 녀석의 사진을 다시 보니까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아니면 방금 홍삼액을 마셔서 그냥 그런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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